아침 일곱 시 이십 분, 나는 주방 카운터에 기대어 막 내린 핸드 드립 커피를 마셨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미디엄 로스팅의 산뜻함이 혀끝에 머물 때, 정확히 위층에서 무언가 둔탁한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동은 머그잔 속의 커피 표면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소리는 단조로웠고, 그 뒤를 이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것이 한국의 아파트 생활이다. 수직으로 쌓아 올린, 이름 없는 타인의 생(生)이 벽과 바닥이라는 콘크리트 매개체를 통해 나의 가장 사적인 순간을 침범하는 방식. 나는 이 소리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열쇠 꾸러미, 어쩌면 갓난아이의 장난감, 혹은 그저 어딘가에서 벗어난 고양이의 점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리의 종류가 아니라 그 소리가 지닌 ‘중력’이다. 우리는 언제나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에 의해 끊임없이 인지되고, 또 인지한다는 그 미묘한 중력 아래 살고 있다.
아파트 단지. 이 거대한 콘크리트 숲은 멀리서 보면 마치 바둑판 위를 채운 검은 돌들 같다. 통일성과 규격화의 미학. 200동 1305호와 300동 1305호는 구조적으로 쌍둥이지만,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생의 밀도와 색채는 완벽하게 다르다. 모든 것이 명쾌하게 분류되고 번호가 매겨진 시스템.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시스템 안에서 자신만의 ‘틈’을 발견하려 몸부림친다.
예를 들어, 베란다의 화분. 모두가 같은 규격의 창문을 가지고 있지만, 그 창문 앞에 놓인 화분의 종류와 배치 방식은 그 집주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작은 선언문이다. 붉은 제라늄을 키우는 사람은 아마도 정열적이거나, 혹은 정열적인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이사 온 날부터 줄곧 창가에 놓아둔 낡은 재즈 음반 더미를 바라보았다. <Kind of Blue>와 <Take Five>. 햇빛에 바랜 LP 재킷들은 이 흰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나만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아파트는 한국인에게 단순히 주거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좌표이다. 어느 동네, 몇 평형, 몇 층에 사느냐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욕망까지도 대변한다. 사람들은 이 좌표를 끌어올리기 위해 평생을 복도 끝을 향해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모두가 달성하려는 그 ‘꿈의 공간’은, 완벽하게 통일된 디자인으로 인해 가장 비개성적이고 익명적인 공간이 되어버린다.
나는 가끔 밤늦게 산책을 한다. 단지 내를 서성이는 것은 흡사 거대한 배에 승선한 채 갑판을 걷는 것과 비슷하다. 창문마다 새어 나오는 불빛은 수천 개의 작은 눈동자 같다. 불이 켜진 창은 내부의 삶을 엿보게 해주는 작은 단서이지만, 커튼이나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은 오히려 내부의 비밀을 더욱 증폭시킨다. 저 닫힌 커튼 뒤에서는 지금 어떤 종류의 고독이 발효되고 있을까? 아마도 텅 빈 식탁, 혹은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잊힌 꿈을 끌어안고 잠든 사람이 있겠지.
문득, 오래된 보스턴 아파트에서 살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무 계단은 걸을 때마다 삐걱거렸고, 천장은 낮았으며, 옆집의 말다툼 소리가 벽을 넘어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때의 삐걱거림은 ‘낡음’의 증거이자 ‘시간’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아파트에서 들리는 소리는 다르다. 그것은 ‘낡음’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재(不在)에서 오는 불만족, 혹은 ‘완벽한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대변한다.
우리가 아파트에 갇혀 지내는 것이 아닐까? 아니, 오히려 아파트라는 견고한 껍데기 안에 스스로를 봉인함으로써 바깥세상의 불확실성으로부터 가장 효율적으로 격리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안전과 자산 증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빚어낸, 가장 비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공간이다.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는 테이블에 놓인 무선 헤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빌 에번스의 ‘Waltz for Debby’를 들어야겠다. 피아노 선율이 나의 작은 스물네 평짜리 우주에 울려 퍼질 때, 나는 잠시 동안 위층의 둔탁한 중력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음악이 끝난 후, 이 콘크리트 벽은 다시 수많은 타인의 숨결과 함께 나의 귓가에 조용히 웅성거릴 것임을. 아파트란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았던 시간을 가장 선명하고, 동시에 가장 무심하게 기록하는 거대한 기억의 서랍장 같은 것이다.